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크루이프 (문단 편집) === 클럽 경력 === 요한 크루이프는 10세일 때부터 [[AFC 아약스|아약스]] 유소년팀에서 성장했고 1964년 [[에레디비시]]에서 데뷔하여 데뷔전부터 득점을 올리는 등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하지만 아약스는 13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자신의 영원한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를 만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해 25경기에서 23골을 넣고 [[KNVB 베이커]] 결승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어 7:0 대승을 이끄는 등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46경기 33골을 기록하며 아약스의 에레디비시, KNVB 베이커 더블을 이끌었고 1969년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결승에서 [[AC 밀란]]을 만나 밀란의 [[피에리노 프라티]]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4:1로 패배하며, 우승을 [[AC 밀란]]에게 내주었고 리그에서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라위프, 바소비치, 케이저르.jpg|width=100%]]}}} || || '''{{{#000 요한 크루이프, [[벨리보르 바소비치|{{{#000 벨리보르 바소비치}}}]], [[피트 케이저르|{{{#000 피트 케이저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1년 유로피언컵을 우승한 크라위프.webp|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1년 크라위프 첫 발롱도르.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2년 유로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 크라위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3년 유로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 크라위프.jpg|width=100%]]}}} || 이후 다시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에 도전한 크루이프의 아약스는 [[파나티나이코스 FC|파나티나이코스]]를 2:0으로 격파하여 마침내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미헬스 감독을 떠났으나 1971-72 시즌 아약스는 에레디비시에서 단 1패만 기록했고, 크루이프는 KNVB 베이커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이끌었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2골을 넣으며 유러피언컵 2연패 달성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클럽 최초이자 축구사 두 번째[* 최초는 1966-67 시즌 [[셀틱 FC|셀틱]].] [[트레블]]을 달성하였고, 1년후에도 결승전 [[유벤투스 FC|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다. 이때 크루이프는 1971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라위프 바르사.gif|width=100%]]}}} || || {{{#000 '''바르셀로나 시절'''}}} || 1973년에 아약스를 떠나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의 부름을 받고 스페인 [[라리가]]에 진출한 크루이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독재자]]의 팀에서 뛰지 않겠다"라며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를 [[디스]]하고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를 택한다. 그의 이적료는 600만 길더[* 유로화 이전의 네덜란드 화폐. 환산하면 약 200만 달러, 92만 파운드.]로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이적료가 너무 높아 스페인 당국에서 허가를 받지 못하자 [[농기계]]로 등록해서 데려왔다는 이적 비화가 있다.[* 후일 크루이프가 새롭게 기틀을 닦은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아카데미의 이름인 [[라 마시아]]의 뜻이 농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이때의 이적료를 유로로 환산하면 36만 유로였는데 연봉이 15만 유로였다. 당시 바르사의 스타였던 후안 마누엘 아센시의 연봉이 5,400 유로였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감이 온다. 이에 아센시는 크루이프가 경기 중에 조금 더 뛰어달라고 요청하자 "네가 더 많은 돈을 받으니 네가 더 많이 뛰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어쨌건 간에 1973년 9월에 이적 합의를 맺었지만 행정 절차가 늦어져 실제 데뷔한 것은 그해 10월 28일 [[그라나다 CF|그라나다]] 전이었다.[* 크루이프가 데뷔하지 못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UEFA컵]]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크루이프가 해당 시즌 유럽 대항전을 1경기도 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3년 크라위프 발롱도르.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4년 크라위프 발롱도르.jpg|width=100%]]}}} || 당시까지만 해도 바르사는 당대의 이름난 전술가를 차례로 데려왔지만, 기대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에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미헬스와 크루이프였다. 이렇게 바르사에 온 크루이프의 기량은 [[그라나다 CF|그라나다]]와의 데뷔전 멀티골로 시작하여, 1974년 2월 17일 프랑코가 지켜보는 [[엘 클라시코]] 원정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두며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크루이프가 없던 1973년 10월 7일 엘 클라시코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바르사는 1945년 이후 근 30년만의 5:0 승리이자 마드리드 원정 사상 최초 5:0 승리, 가장 큰 점수차를 기록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961년 이후 14년 동안 라리가 타이틀을 들지 못한 바르셀로나는 오랜 숙원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에 따라 크루이프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가 이 시즌에서 보인 성적은 16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4위였다. 그리고 크루이프는 1973년과 1974년에 [[발롱도르]]를 연속 수상하여 세계 최고 선수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 그러나 이 때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수상할 때는 소속만 바르셀로나지,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보단 사실상 아약스에서의 유러피언컵 우승과 네덜란드 국대에서의 월드컵 준우승 활약상으로 수상했다. 1974년 월드컵 이후 크루이프는 지금과 같은 빅클럽이 아니었던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뛰면서 [[코파 델 레이]] 하나를 드는데 그쳐 우승과 거리가 멀어졌고 발롱도르와의 인연도 끊어지는 등 아약스 시절 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우승권 팀으로 이적했다면 기록적인 면이나 수상 경력 면에서나 실제보다 더 높은 위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컸고 바르셀로나를 현재 높은 위상으로 올리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정말 크루이프를 신격화시켜도 이상하지가 않다.] 1974년 6월 29일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4:0으로 털어 설욕했으나 이때까지 코파 델 레이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출전할 수 없어서 크루이프와 당시 공격의 축이었던 1호 외국인 선수 [[우고 소틸]]이 뛰지 못한 경기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라위프 AT전 득점.jpg|width=100%]]}}} || || ''' {{{#000 '''1973년 12월 22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 득점'''}}} ''' ||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공중 발리 슈팅으로 '[[플라잉 더치맨]]'이라는 별명을 추가하며 매번 라리가 무대에서 화려한 축구 쇼를 보여주던 크루이프는 바르사의 [[주장]] 완장까지 꿰찼다. 그러나 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4/75 시즌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 원정 0:1 패배, 안방 0:0 무승부로 우승 타이틀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말았다. 1975년에 이르러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뒤 크루이프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1년 동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휘하면서 3번의 리그 우승과 1975년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우승을 이끈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취임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전술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측면에 기용하려 한 지시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세비야 FC|세비야]]와의 경기 도중 교체된 크루이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충돌했다. 그러나 엘 클라시코에선 안방 2:1, 원정 2:0으로 이기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동료인 [[카를레스 렉샤흐]]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1975/76 시즌 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또 뺏기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바이스바일러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갈 즈음인 1976년 4월에 경질되었다. 이후 라우레아노 루이스 감독대행을 거쳐 친정인 아약스에서 감독을 하던 미헬스 감독이 돌아오면서 은사와의 눈물의 상봉을 거둔 크루이프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비록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1점이 뒤져 라리가 타이틀 탈환은 실패했지만 1976/77 시즌 동안 크루이프는 엘 클라시코에서 두 번 다 득점하여 1승 1무로 우위 전적을 만들었다. 경기력은 바르사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해에 크루이프는 [[라리가]]에서 14골을 기록하며 줄어든 득점력을 회복했다. 1977/78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 2연패를 당해 라리가 우승을 날려먹으면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헬스 감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다시 사임 수순을 밟았고, 애제자인 크루이프 역시 계약이 만료되자 바르사를 떠났다. 이대로 가면 명예롭게 은퇴하는가 했으나,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려 먹으면서[*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일이 있고 나서 재산관리는 그의 장인이 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면을 보면 크루이프는 현역 시절 정말로 축구밖에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돈을 벌려고 선수로 복귀, 1979년 7월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이었던 미국 북미 축구 리그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와 계약하면서 미국에서 뛰게 되었다. 1980년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서 뛰다가 1981년 2월 스페인 [[레반테 UD]]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다시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입단하였고 1981년 12월 네덜란드 아약스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절 아약스 소속으로 [[PSV 에인트호번]]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허정무]]와 맞대결이 있었는데 허정무가 그의 마크맨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 번 허정무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언론들이 이를 비판하자 요한 크루이프 옹 왈. "'''저 한국 선수가 너무 잘해서 제치려다가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라고 한 건 유명한 일화라고 전해지지만 당시 네덜란드 현지 기사 등에서 근거자료는 찾기 어렵다.][* 허정무는 훗날 [[무릎팍도사]]에서 "그때 내가 코를 다치고 경기장에서 나갈 때 네덜란드 관객들이 자국의 불세출의 영웅에게 야유를 하는 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라고 술회했다.] 198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축구화를 벗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